마(魔)의 정체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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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 월란
기억의 길 가에 서 있던 소(牛)들은 늘 먹은 것을 게워 내어 되씹고 있다.
하루는 예정된 빛을 향해, 하루는 예정된 어둠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려가도록 나를 부축해 온 것들이 있다. 누군가 떠나 버린, 마른버짐처럼 허옇게 탈색되어 버린 땅 위에서도 혈색 좋게 돋아나 꽃을 피우던 일상의 욕기들. 어느 날은 철제 버팀목같이 든든해 웃음 주었던, 어느 날은 타넘어야 할 가시 돋힌 철창되어 가로막던 인연의 사슬들. 곰삭인 신열이 발음도 거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올 때쯤, 돌아보면 어둠의 옷들이 입혀지고 마는 정체구간이 있다. 후퇴도 전진도 아닌 내 안으로 들어가 고스란히 머무는 시간.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아 왔다는, 떨어뜨리고 지나쳐 온 그 무엇인가를 가지러 가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다 보면 어둠의 옷이 입혀지고 있다. 허물어지던 골목길이, 두 팔 벌린 가로수가, 고개 쳐든 꽃들이 솔기 하나 튿어지는 소리 없이 어둠의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밤의 세공사가 소리 없이 조각해 내는 어둠의 꽃들. 내게 만져지는 것들은 왜 모두 슬픔으로 변해버리나. 생애의 끄트머리는 언제나 슬픔이라고.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맡고, 만졌던 것들이 몸의 미로를 거쳐 배설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철퍼덕 주저 앉아 버린 것들, 게워 내고 되씹어 뱉어 내야 하는 것들, 반추되지도 못하는 굼뜬 통증이 두려워 묻어 둔, 페스트같은 열병의 자국도, 죄 앞에 노예의 근성으로 밖에 설 수 없었던 순간들도 바람에 스미듯 어둠의 옷으로 갈아 입는 정체구간, 백태 낀 심경에 태열의 흔적마저 말끔히 지우고 난, 기억의 통로에 가끔씩 서서 타액 묻은 턱주가리를 우물거리던 그 소의 멍하고도 신비한 눈빛을 닮고 싶다.
2007.9.11
댓글목록
김화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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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하루의 빛과 어둠이 우리네 인생도 소가 되새김하듯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져가고 있나봅니다.
이월란 시인님 그동안 안녕하세요?
항상 좋은글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오늘도 좋은하루 행복하세요*^~~
김성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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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통찰에 경의를 표합니다.
마의 정체구간을 어슬렁거리는 어느 것 하나,
시인님의 눈을 벗어나지 못하네요.
하지만
<내게 만져지는 것들은 왜 모두 슬픔으로 변해버리나>,
이 말이 왜 제 가슴까지 죄는지요...
목원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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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통로에 가끔씩 서서 타액 묻은 턱주가리를 우물거리던 그 소의 멍하고도 신비한 눈빛을 닮고 싶다. >
턱주가리, 해부학의 하악골을 표현하신 것 같은데, 덕분에 여태껏 듣고 보지 못했던 우리말을 접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영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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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구간없이 유유히 잘흐르기를
기원합니다...
전 * 온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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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랬만인것 같네요, 이월란 시인님!!
가다보면 정체되어 아득한 기억 속에서 반추되는 추억을 만나곤 했습니다.
씹어도 씹어도 부서지지않는 그런 추억이
가슴 한켠에서 오랬동안 마음을 부대끼게 하던 날,
그런 날엔 멀리 돌아서 가곤 했지요.
시인님의 글이 뭉클거리는 추억을 하나 꺼집어 냅니다. 오늘,
궁금 했습니다. 몇일동안, ㅎㅎㅎ
김성회님의 댓글
김성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그렇군요 언제나 이월란선생님의 서전에는
높은 철학이 머물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좋은 서전에 잠시 흔적 내려두고 갑니다.
이순섭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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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정체구간 소의 선한 두 눈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가을의 문턱 조석으로 찬바람 불고 늦은 밤 마다 귀뚜라미는 울고 있습니다.
소중한 글 `마의 정체구간` 잘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