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라(藤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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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5건 조회 892회 작성일 2008-01-21 09:46본문
이 월란
너도 나도 등마루 곧추 세워 하늘로 솟구치는 세상
해진 앞섶으로 젖은 길 닦으며 가는 날 있었겠다
살대 하나 없이 허공을 사는 올곧은 등뼈들이 서러워
가슴 무너지는 날도 지냈겠다
휠체어같은 버팀목에 앉아야만 하는 느물대는 가닥이 억울해
심장 부서지는 날도 살았겠다
감싸 안아야만 하는 수직의 장애를 만날 때까지
해토의 시린 땅을 배로 기는 버러지가 되어
백태 낀 혓바닥으로 행인들의 발자국을 핥았겠고
바닥에 길들여져 그늘을 주우며 살아왔겠다
누군가에게 기생해야만 자라는 목숨이 버거워
누추한 영혼의 집안으로 뒤엉키기도 했었고
함부로 허공 한 줌을 침범치 못해
기진한 듯 담장에 붙들린 행로에 만족하며
울끝까지, 맘끝까지 어루만지고서야
통회하고 자복하는 겸손의 성지를 쌓았으리
한번 맺은 인연 위에 잎새의 모티브를 따라
거친 살비듬 덮어가는 저 묵언수행을 당해냈으니
햇귀처럼 뻗치는 수맥을 다독여
무수한 허공의 길을 해독하려 들지도 않고
눈 잃어 점자책 더듬듯 가로막힌 담장을
경전처럼 읽어내려 왔으리
천혜의 절벽도 타고 오를 암벽 등반가가 되어
영험한 순종의 도(道)로 벽마다 초록 문신을 새기고
넌출 덮인 담장 사이를 걸어가는 귀밝은 사람들에게
무림의 숨소리 대신 전해주는 저 숲의 압축파일
2008-01-20
댓글목록
김혜련님의 댓글
김혜련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의 무게가 느껴지면서 무엇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살대 하나 없이 허공을 사는 올곧은 등뼈들이 서러워
가슴 무너지는 날도 지냈겠다', '누추한 영혼의 집안으로 뒤엉키기도 했었고/ 함부로 허공 한 줌을 침범치 못해', '무림의 숨소리 대신 전해주는 저 숲의 압축파일' 이런 부분이 참 인상적이어서 마음에 듭니다. 좋은 시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원진님의 댓글
목원진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싸 안아야만 하는 수직의 장애를 만날 때까지
해토의 시린 땅을 배로 기는 버러지가 되어
백태 낀 혓바닥으로 행인들의 발자국을 핥았겠고
바닥에 길들여져 그늘을 주우며 살아왔겠다.
같은 줄기를 뻗어가는 식물이지만, 사람의 취향에 알맞은 것은
잘리지 않고 행인의 발꿈치에 밟히게 전에 주인에 사랑받아 비료 얻고
물 받아 자라지만 모양 없고 취향에 아니든 줄기 식물은 잘리어 말라 불태워
버리네요. 동물도 식물도 주인을 잘 만나야 곱게 자라는 군아, 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윤석님의 댓글
고윤석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표현들이 너무 좋아요..눈 잃어 점자책 더듬 듯 가로막힌 담장을 경전처럼 내려왔으리...좋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정유성님의 댓글
정유성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의 졸업작품 중에 솟대를 등라하는 칡넝굴(뱀형상)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머리 속이 온통 정리 안되는 모같은 철학으로 방황하던 때였지요.
하지만 그때 그런 젊은 혈기가 지금 그리운 것은 왜일까요.^^*
아직도 젊지만 그 때는 세상도 사랑하나면 바꿀 것 같던 기세였답니다.^^*
깊이있는 글 뵙고갑니다. 건강하세요, 시인님.^^*
장대연님의 댓글
장대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게도 등나무를 소재로 한 시가 한 수 있습니다만,
이 시인님의 글을 대하면서
저 섬세한 터치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